위령 성월과 이태원 참사

“오늘은 나, 내일은 너.”(Hodie mihi, Cras tibi) 간혹 천주교 묘지 입구에서 볼 수 있는 이 라틴어 경구는 가던 길을 멈추고 인간의 삶과 죽음을 잠시라도 돌아보게 한다. 먼저 하늘나라로 간 모든 이들의 영혼을 생각하고 기도하는 위령 성월은 가는 해의 끝자락에서 삶의 종국적 의미를 곱씹어 생각하게 하는 반성의 시간을 허락한다. 그러나 올해 위령 성월은 죽음에 대한 이런 잔잔한 성찰과 묵상의 시간으로 보내기에는 마음이 번거롭고 무겁다. 2014년 꽃 같은 아이들 수백 명이 수장되어 불귀의 객이 됐던 때처럼 온 나라가 이태원에서 숨진 젊은 넋들에 가슴 아파하며 눈물로 추모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월호의 아이들이 물에 잠겼던 그날처럼 남겨진 가족과 친지, 국민들은 누워 죽지도 못하고 서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그 아비규환과 같은 생지옥의 죽음이 왜, 어떻게, 무엇 때문에 일어난 것인지 묻고 있다. 이에 대해 무엇보다도 먼저 국민의 안전을 책임진 당국이 나서서 자초지종을 알리고 사죄를 구해야 했다. 그러나 행정부와 관할구청, 경찰청, 해당 부처의 수장이라는 자들은 하나같이 변명과 무책임, 배 째라는 식의 뻔뻔함으로 일관하고 있다. 사건을 덮으려 쉬쉬하거나 축소, 왜곡, 호도하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고, 이제 꼬리 자르기 수순을 밟고 있는 듯하다. 진정한 사과나 진상규명에 대한 일언반구도 없는 상황에서 현 행정부의 대표라는 자는 맥락도 없이 돌연 피해자 보상을 운운한다. 정권이 바뀌고 6개월밖에 되지 않은 시점에서 지도자를 잘못 뽑으면 나라가 얼마나 빨리, 얼마나 광범위하게 망가질 수 있는가를 생생하게 목격하고 있다. 그러나 그 대가는 너무 크고도 가혹하다. 사과 요구와 진상규명을 희생자 가족이 떠맡아야 하는 현실은 너무도 불의하고 잔인하다. 앞으로 남은 4년 6개월을 어떻게 버텨야 할지 암담하기만 하다.

브라질 보우소나루의 패배

이태원 참사가 일어났던 날 지구 반대편에 있는 브라질에서는 대통령 투표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결국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을 2퍼센트 차로 따돌리며 전직 대통령 룰라 다시우바가 다시 한번 대통령에 당선됐다. ‘열대 지방의 트럼프’라고 불리는 보우소나루는 아마존 밀림을 상업화하고 그 자리에 ‘버거킹 같은 패스트푸드점을 짓겠다’든가 ‘총기를 합법화하겠다’고 발표해 세계 시민사회의 우려를 샀던 인물이다.1) 또 코로나 역병이 브라질을 강타했을 때 수만 명이 죽어가는 상황에서 "내 자식, 내 가족이 아니니 상관없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공공연하게 해 자국민의 공분을 사기도 했다. 왜 ‘남미의 트럼프’라고 하는지 이해가 가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가 이번 대선에서 이겼다면 가뜩이나 그의 재임 기간에 현저하게 망가진 아마존 열대우림의 파괴는 훨씬 더 공공연하고 대규모로 진행되었을지도 모른다. 생태계 자체의 파괴와 더불어, 가뜩이나 기후변화 등으로 많은 피해를 입고 있는 가난한 나라 빈민들의 고통이 더 가중될 거 같아 심히 우려된다.

브라질 전 대통령 자이르 보우소나루. (사진 출처 = commons.wikimedia.org)
브라질 대통령 자이르 보우소나루. (사진 출처 = commons.wikimedia.org)

본 칼럼의 관심과 관련해서 좀 더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보우소나루가 가톨릭 신자였다는 점이다. 좀 더 정확히는 그가 가톨릭으로 영세했지만 대선 가도 중 복음주의(evangelical) 교회로 전향해 목사로 탈바꿈했고 그것을 배경으로 2018년 대선에서 승리했다는 사실은 우리 가톨릭교회를 돌아보게 한다. 그는 많은 신도가 복음주의로 개종한 브라질의 상황, 나아가 남미 가톨릭교회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방언, 통성기도, 치유 퍼포먼스 등으로 상징되는 이 보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성향의 복음주의 교회는 많은 이들, 특히 가난한 이들을 파고들었다. 그 결과 1970년대까지만 해도 90퍼센트를 유지하고 있던 가톨릭이 현재에 이르러 거의 반 토막이 난 반면 복음주의 신도수는 이 나라 인구의 거의 1/3에 육박한다. 다른 성공 요인이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양극화가 극심한 남미, 특히 브라질에서 이 복음주의 교회가 가난한 이들의 몸과 마음을 치유하고 돌봐 주었다는 사실이 두드러진다. 이들은 예배당 안에서 큰 소리로 울부짖고 통곡하면서 심리적인 해방감을 맛본다. 그러나 이러한 해방감은 예배당을 벗어나서 현실로 돌아오면 얼마 가지 못하고 사그라든다. 이들이 마땅한 직업을 찾지 못한 채 다시 마약에 손대고 또 술에 찌들어 부랑자나 노숙자로 전락하고 마는 것을 제대로 파악한 복음주의 교회들은 음식을 제공하고 크고 작은 직업을 알선하는 등 일상의 먹을 것, 입을 것, 잠잘 곳에 관심을 써 준다.

여기에 바로 극우적이고 보수적 신앙관을 가진 복음주의 계열 교회라고 해서 색안경을 끼고 봐서는 안 되는 신앙의 힘이 있다고 보인다. 그것은 가난하고 주변화된 이들을 인격적으로 대하고 보살펴 주는 인간에 대한 신뢰라고 할 수 있다. 해방신학의 세례를 흠뻑 받은 브라질 가톨릭교회가 “가난한 이에 대한 선택”이란 말만을 습관적으로 반복하고 있을 때, 정작 가난한 이들은 “복음주의 교회를 선택”하는 일이 벌어졌고 50여 년 동안 이런 일들이 쌓이자 교세가 크게 역전된 것이다.2) 물론 남미에서 복음주의 교회를 이런 관점으로만 보는 것은 위험하다. 북미와는 다르게 남미 복음주의 교파의 신앙적 스펙트럼이 다양하고 그 정치적 색깔 역시 하나로 묶기 어렵다는 특징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3) 더욱이 보우소나루의 예에서 보이듯, 정치적으로 동원되고 이용되며 나아가 남미 정치 발전에 깽판을 놓는 반동적인 역할을 해 온 측면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복음주의 교회와 가난한 민중 사이에 신뢰 관계가 구축된 것은 인정해야 할 듯하다.

브라질 대선이 주는 교훈

현 정권은 많은 부분에서 보우소나루와 닮았다. 현 정권이 특정 지역과 특정 계급, 특히 가난한 이들과 거리가 먼 부르주아와 매판자본, 또 매판 지식인과 일부 수구 반동 개신교파를 중심 지지 세력으로 한다면 보우소나루는 상파울루, 리우데자네이루 같은 대도시 부르주아와 극보수 복음주의자들을 근간으로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더욱이 보우소나루는 대통령이 되자마자 빈민가에 제공하던 의료복지 의료인을 대거 추방하고 빈민 복지 예산도 무더기로 삭감함에 따라 코로나 역병이 터졌을 때 자국민 70만 명을 사망케 한 최악의 상황을 초래했다. 이런 일이 발생했음에도 반성과 사죄는커녕 뻔뻔함과 안하무인으로 막말을 해대는 것까지도 한국의 현 정권과 흡사하다. 임기 초반부터 한국 정치사상 최악이라는 평가를 받는 현 정권 아래서도 얼마든지 브라질과 같은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아니 이번 이태원 참사를 놓고 보건대 보우소나루보다도 더 참담하고 끔찍한 상황으로 치닫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도 든다. 시민 촛불혁명 덕에 집권했지만 기층 민중의 생존권이 정책 어젠더에서 실종되고 적폐 보수 세력의 눈치만 살피다 개혁은커녕 정권 재창출에도 실패한 야당은 정신차려야 한다. 가만히 앉아서 울먹이며 ‘국민을 믿는다’며 책임을 슬쩍 국민에게 넘기는 그런 얄팍한 태도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말로 안 된다고 판단하면 미적거리지 말고 삭발이라도 하고 시민들의 투쟁에 동참하라. 그러면 시민들은 그 진정성을 조금이라도 사 줄 것이다.

이번 브라질 대선은 가톨릭교회가 새겨야 할 몇 가지 교훈을 남겼다고 보인다. 브라질과 남미뿐 아니라 아프리카에서도 복음주의가 부상하고 있지만 이를 단순히 그런 흐름이나 현상만으로 치부해 넘겨 버려서는 안 된다. 그 내적 원인이 무엇인지 정확히 진단하고 대처해야 한다.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1980년대 혁명의 근거지요 전진기지 역할을 한 ‘기초교회공동체’(BCC)의 몰락이다. 브라질 교회는 80년대 이후 상당 기간 동안 BCC를 강화하기 위한 사목정책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교계와 사제들은 복음주의가 발흥하는 반면 소공동체가 몰락해 가는 것을 심각한 문제로 보지 않았다.4) 보수적인 주교들의 임명으로 브라질 교회가 분열된 것은 바티칸의 책임이지만, BCC를 일상의 삶과는 무관한 ‘복음나눔 모임’으로 전락시킨 데에는 지역 주교와 일선 사목자의 책임이 크다. 중세라면 가톨릭의 거대한 조직과 전일적 명령체계가 효과적이었겠지만 다양성과 참여를 시대정신으로 하는 후기 근대의 상황과는 잘 맞지 않는다. 가톨릭에서 복음주의로 개종하는 이유가 “신도에게 더 많은 도움을 주는 교회를 찾아 떠나는”5) 데 있다면, 그런 약점을 어떻게 보완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연구해야 한다. 어쩌면 BCC 같은 소모임을 단지 복원이 아니라 ‘다시 만든다’는 점에서 ‘재생’(recreation)하는 데에 사활을 건다면 가능성을 볼 수 있지 않을까.

1) '브라질 선거에 전 세계가 주목하는 세 가지 이유', <BBC News 코리아>, 2022.9.28.
2) Francis X. Rocca, Luciana Magalhaes, and Samantha Pearson, 'Why the Catholic Church is Losing Latin America', <The Wall Street Journal>, 1.11.2022.
3) Amy Erica Smith, 'Religion is shaping Brazil’s presidential election – but its evangelicals aren’t the same as America’s', <The Conversation>, 9.26.2022.
4) Eduardo C. Lima, 'As evangelicals gain, Catholics on verge of losing majority in Brazil', <National Catholic Reporter>, 2.5.2020.
5) Francis X. Rocca, Luciana Magalhaes, and Samantha Pearson, 앞의 글.

황경훈

우리신학연구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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