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내가 누구이고, 나는 인생의 길에서 어디쯤 와 있는지가 급한 숙제처럼 마음을 서늘하게 하는 때가 있다. 늘 지금 내 삶은 어디에 놓여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하는 숙명을 안고 살아가는 수도자가, 그것도 이렇게 나이를 먹고도, 갑자기 서늘해지는 것은, 여전히 수확할 것이 없는 빈 껍데기 삶이어서일 것이다. 추석 명절에 비록 송편 같은 것은 꿈도 못 꾸고, 대신 산타 쿠르즈 바닷가 조그만 피정 집에서 학교 직원들에게 피정을 해 주었지만, 달은 여전히 나에게 넌 이렇게 따스하고 정답게 누군가를 비쳐 보았느냐고 부드럽게 묻는 것 같다. 달빛을 담은 바다는 온통 은빛으로 찰랑이는데, 그렇다고 저 달을 바라보는 누군가가 눈이 부셔서 눈을 감아야 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인지 달은 그리고 달이 내는 빛은 자유롭고 또 무욕하게 보인다. 그리고 오늘 동그랗게 뜬 저 달은 또 서서히 변해 갈 것이다. 여위어 가는 달을 보면, 혹은 운전하고 집으로 돌아오다 내 눈 앞에 훅 하고 들어오는 초 저녁 달을 보면, 인생은 그렇게 은은하게 사는 것 아니냐고, 서로를 비추며 여위어 가는 거 아니냐고 말을 건네는 것만 같다.

나는 이번 피정에서 우리 학교의 역사를 돌아보다가 홀리네임즈 대학의 영성 하나를 깊이 느꼈는데, 그걸 말로 표현하자면, 작게, 그러나 소중하게 사람을 사랑하는 일인 것 같다. 우리 학교는 한 번도 큰 학교인 적이 없었고, 오히려 지나치게 커지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 왜냐하면, 한 명 한 명을 깊이 알고, 사랑하면서 하는 교육이기 때문이다. 교사들, 도서관 사서들, 그리고 간호 보조원들 같은 수고하면서 보수가 적은 사람들의 자녀들에게 주는 장학금, 이민자들에게 주는 장학금, 집안에서 처음 대학 가는 사람들을 위한 장학금은 절대 다른 데로 돌려 막기 할 수 없다. 깊어가는 재정난에 허덕이는 우리는 늘 괴롭지만, 이런저런 시간의 굽이굽이에서 학생들은 성장해 갔고, 지금도 그들의 마음은 인격을 갖춘 인간으로 변해 갈 것이다.

그래서 저 은은한 달빛을 보면서, 이 미션을 멈추라 하시면 멈추겠지만, 이 시대, 그리고 이 장소에서 만나는 젊은이들의 삶이 너무 고단해서, 여기 이곳에서 더 머물고 싶다고 주님께 말씀드렸다. 요즘 자주 생각하는 책이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인데, 나는 늘 달을 사모하며 따라왔지만, 6펜스도 좀 주실 수 없냐고 기도 드렸다. 괜히 달이 날 보고 웃는 것 같았다. 그래도 시치미를 떼고, 6펜스만 주시면, 우리의 미션이 한숨 돌릴 것 같다고 중얼거렸다. 달을 따라나선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느님께 6펜스를 청하고 있을까를 생각하니, 갑자기 우리의 가난이 당연하고, 또 기죽을 일은 더욱더 아닌 것 같아 마음이 넉넉해진다.

추석 저녁에 학교 직원 피정을 하다, 생은 달처럼 부드럽고 은은하게 여위는 일임을 생각한다. 어디서든 그렇게 사랑하는 것임을 떠올린다. ©박정은
추석 저녁에 학교 직원 피정을 하다, 생은 달처럼 부드럽고 은은하게 여위는 일임을 생각한다. 어디서든 그렇게 사랑하는 것임을 떠올린다. ©박정은

한국에서의 즐거운 시간을 뒤로하고, 미국에 도착한 후 나는 코로나를 앓았다. 무조건 쉬어도 되는 허락을 받은 마음으로 한 주를 쉬고, 뒤늦게 수업을 시작했다. 얼굴을 보면서, 함께 웃고, 질문을 하는 이런 수업이 참 오랜만이어서 맘이 찡했다. 복도에서 작년에 줌 수업에 들어왔던 빨갛게 머리를 염색한 코르트니라는 여학생을 복도에서 마주쳤는데, 그가 내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행복하세요?” 하고 인사했다. 매번 수업에서 내가 “행복하니?” 하고 물어주었는데, 그걸 기억하고 나에게 똑같이 물어준 것이다. 반가운 마음에 깊은 포옹을 하면서, “오 주님, 난 이 젊은이들을 너무 사랑하는데, 만약 이 수업이 마지막이 된다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사랑하는 일이 겠지요” 하는 질문이 든다.

피정을 마치며, 직원들은 내게 앞으로의 비전이 무어냐고 물었다. 내가 우리는 작아지고 더 작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예수님의 부서진 삶처럼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마지막 구절은 생략했다. 우리 학교가 다시 초창기 수녀님들이 작고, 가정 같은 학교를 만들었던 것처럼, 우리는 새롭게 그 맘을 해석해야 한다고. 온라인 수업을 해도, 우리는 그냥 기계처럼 찍어내는 온라인 수업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을 온라인 공간 속에서 사랑하는 수업이어야 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렇게 피정을 하면서, 무언가 마음속에 명료함이 생겨났다. 나는 사실 2년 동안, 학교의 미래를 고민하면서, 이제 난 다른 미션을 향해 떠나야 하는가 하는 주제를 가지고 식별을 하고 있었다. 더 가난한 곳에 가서 학생들을 가르치고도 싶었고, 아프리카에 수녀님들을 위한 영성센터를 운영하고 싶었고, 내가 사랑하는 우리 나라의 산속에 조그만 오두막 집을 짓고 살아 보고도 싶었었다. 더 늙으면 너무 늦을 텐데, 언제 그만두어야 하나. 그러면서 어떤 사인을 기다렸다. 콩고에 있는 친구가 함께 무언가를 하자는 제안도 있었고, 미국의 다른 학교에서 영성 교수로 오면 어떠냐는 제안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 피정을 통해, 내가 머물 곳이 어딘지가 분명해졌다. 

바닷가를 산책하다 파도와 친해져 버렸다. 날 새롭게 다가오는 파도는 나를 적시지만, 그래서 나는 깨어 있고 또 달릴 힘을 얻는다. 지금 우리 학교가 겪는 이 재정적 어려움도 파도라면, 아무렇지 않게 그 곁을 걸어가 보기로 한다. 좋은 동지들과 함께. ©박정은
바닷가를 산책하다 파도와 친해져 버렸다. 새롭게 다가오는 파도는 나를 적시지만, 그래서 나는 깨어 있고 또 달릴 힘을 얻는다. 지금 우리 학교가 겪는 이 재정적 어려움도 파도라면, 아무렇지 않게 그 곁을 걸어가 보기로 한다. 좋은 동지들과 함께. ©박정은

그저 내가 해야 하는 일은, 오늘이 내 인생 마지막 수업처럼, 그렇게 학생들을 보듬고 사랑하면서, 그들에게 가장 좋을 수업 자료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철학 첫 수업에 나는 학생들에게 이십 년 후에 너희가 있을 곳과 할 일을 상상해 보라고 했다. 학생들은 캘리포니아 어디에선가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있을 것이라고 했고, 또 어떤 학생은 작가가 되어서 스페인에 살면서 소설을 쓰고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또 어떤 학생은 축구 코치가 되어서 자기가 자란 이디오피아에 가 있겠다고도 했다. 나는 이 젊은이들에게 꿈꾸는 것은 젊은이들의 권리라고 이야기했다. 학생들은 내게 너는 이십 년 후에 무엇을 하고 있을 거냐고 되물었다. 그래서, “나는 이곳에 있지 않을 것야. 난 학생들과 너무 나이 차이가 나는 거 싫다”고 했다. 그랬더니 한 학생이, 철학 교수는 늙어야 어울린다고 해서 모두 함께 웃었다. 내일의 비전을 세우는 일은 내 소관이 아니다. 내게 주어진 미션은 그저 오늘 작게, 하지만 정성스레 사랑하는 일이다. 

그러고 보니 마음에 평화가 온다. 크게 사랑하고, 엄청나게 어려운 철학을 가르치는 게 내 소명이 아니니까. 그저 나와 내 학생들이 만들어 가는 공간이 안정감과 지적 호기심을 키워 주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주님이 주시는 소명을 따라가면 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마 나는 늙는다는 것 때문에 좀 조바심을 친 것 같다. 시간과 다투면서, 다음 미션이 있다면, 하루라도 젊을 때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늘 재정적 위기를 겪는 홀리네임즈 대학의 한 교수로서, 살아가는 게 나에게 꼭 맞는 미션인 것 같다. 가난한 학교는 동료들에게 늘 미안하고, 직원들에게는 늘 고맙고, 학생들에게는 늘 안쓰러운 맘이 든다. 그러나 어쩌랴, 난 이럴 때, 예수님이 보이고, 그분의 십자가가 그래도 조금 가까이 느껴지는 걸.

내 학생들은 수업을 일곱 개씩 듣고, 운동선수로 뛰고, 또 과외로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과 약속했다. 한 학기, 내 수업에 한해서는 게을러지기로. 숙제는 가끔 안 해도 괜찮고, 대신 삶에 대해서 좀 생각해 보기로. 늘 가난과 싸우며 힘들게 지내는 내 학생들에게, 너무 많은 과목을 듣느라 얼굴이 어두운 그들에게, 우리가 사는 인생은, 우리가 살아갈 세상이 어떠하길 바라느냐는 주제를 가지고, 게으르게 몽상하면서, 그렇게 사유하면서 살기로 했다. 철학 수업에 페이퍼 하나 못 내면 어떤가, 생의 의미를 찾기 위해 게으를 수 있다면 말이다. 그래도 여전히 아직은 동그란 보름달을 보면서, ‘하느님, 우리 학교에 천국의 6펜스를 보내주실래요?’라고 기도한다.

박정은 수녀
미국 홀리네임즈 대학에서 가르치며, 지구화되는 세상에서 만나는 주제들, 가난, 이주, 난민, 여성, 그리고 영성에 대해 관심한다. 우리말과 영어로 글을 쓰고, 최근에 “슬픔을 위한 시간: 인생의 상실들을 맞이하고 보내주는 일에 대하여”라는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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