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가톨릭평론> 34호(2021년 겨울)에 실린 글입니다.

만삭의 새드(Sad)를 지켜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피부에 문제가 있던 새드는 젖꼭지가 없어 낳는 새끼마다 젖을 먹이지 못해 항상 죽는다고,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의 차크마개코원숭이 연구팀에 합류하던 첫날 조교에게서 들었기 때문이다.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 전역에 퍼져 사는 개코원숭이 중에서 차크마개코는 짙은 회갈색 털이 특징인데 이 때문에 출산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엉덩이 살갗의 진분홍 빛깔은 더욱더 눈에 띄었고, 한껏 불룩해진 배와 함께, 새드가 다시 한번 겪을 상실을 선명하게 예견했다.

얼마 뒤 새드는 출산했다. 자료수집 절차에 따라 새끼의 성별을 확인하기 위해 들여다본 망원경 렌즈 안에는, 까만 새끼가 새드 품에서 꼬물대고 있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지 않아 개코원숭이 무리를 다시 만났을 때 새끼는 축 늘어져 있었다. 여느 개코 어미들이 그러하듯, 새드는 새끼의 사체를 안고 다니며 사나흘을 보냈다. 여러 원숭이 종에서 관찰되어 온 이 행동이 왜 진화했는지 아직 뾰족하게 설명된 바는 없다. 하지만 새끼가 갑작스럽게 죽었을 때보다 그렇지 않았을 때 (예컨대 앓다가 죽었을 때) 새끼 사체를 안고 다니는 일이 자주 관찰된다는 최근 연구결과는,1) 원숭이들에게도 죽음에 대한 인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새끼가 죽은 줄 몰라서 사체를 안고 다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평생 새끼를 잃기만 했을 새드에게는 더욱더 그러하리라.

모성의 진화를 공부하고자 야생 영장류를 찾아간 내가 만난 첫 원숭이는 이처럼 공교롭게도, 낳는 새끼마다 죽는 ‘슬픈’ 어미였다. 새드라는 이름 그대로 말이다.

차크마개코원숭이. (이미지 출처 =&nbsp;commons.wikimedia.org)
차크마개코원숭이. (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

의인화의 힘, 의인화라는 덫

새드처럼, 사람 아닌 동물을 연구할 때 동물에 사람 이름이나 별명을 붙여주는 경우가 있다. 개체를 기억하고 식별하는 데 도움이 되고, 나아가 감정이입을 통해 동물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제인 구달 박사는 탄자니아 곰비 숲의 침팬지들에게 데이비드, 골리앗, 프로도, 피피 같은 사람 이름을 붙여주고 연구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는 의인화(사람의 속성을 사람 아닌 대상에 투사하는 것)에 부정적이던 1950, 60년 당시 학계 분위기에 비추어 보았을 때 이례적인 접근이다. 제인 구달 박사는 오히려 침팬지들을 적극적으로 의인화함으로써 동물연구의 새 장을 열었다. 복잡한 사회관계망에 적응해 나가는 저마다의 방식, 긴 생애를 살아가며 변치 않는 듯 변해가는 성격 등, 당시까지만 해도 사람의 것으로만 여겨지던 사회적 삶의 다양한 결이 구달 박사의 연구를 통해 드러났다.

동물과 시간을 보냈다면 누구라도 알 수 있듯, 사람이 아니라고 사람보다 단순한 것은 아니다. 살아 있는 존재 저마다 복잡한 속내와 사정이 있게 마련이다. 사람 아닌 존재에 이름을 붙이고 의인화하는 것은 그 복잡한 이야기를 들어 보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너도 나와 같다면”이라고 말해 보는 것이다.

그러나 존재를 적극적으로 읽어내는 바로 그 힘 때문에, 의인화는 위험할 수 있다. 예컨대 원숭이와 대형 유인원은 입꼬리를 양옆으로 당기고 이빨과 잇몸을 한껏 드러내는 표정을 짓는다. 독자 여러분도 이 표정을 거울 앞에서 한번 지어 보시기를 권한다. 이 표정을 본 대부분 사람들은 원숭이가 웃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 이 표정은 즐거울 때가 아니라 자기보다 힘센 동료 앞에서 두려울 때 짓는 찡그린 얼굴이다. 굳이 사람 언어로 번역하자면, “나는 너보다 약해, 알지? 그러니까 나 잘 좀 봐주라!”라는 뜻으로, 자기가 상대보다 낮은 위치에 있음을 확인시키고 상대가 자기를 받아주기를 바라는 사회적 신호를 전달한다. 그런 점에서 사람의 웃음과 어느 정도 비슷한 기능을 한다고 할 수 있는데, 사람의 웃는 표정이 어떻게 진화했는지 이해하는 단서가 되지만2) 표정이 전달하는 두려움의 정서는 분명 웃음과 다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단지 인간의 웃음과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원숭이가 사람처럼 웃네!”라고 말한다. 아니다. 원숭이는 ‘사람처럼’ 웃는 게 아니라, ‘원숭이처럼’ 찡그릴 뿐이다. 원숭이들에게 이 표정이 어떤 의미인지, 서커스 쇼에 나와 개구쟁이 웃음 비슷한 표정을 짓는 저 침팬지는 정말 즐거운지 우리는 묻지 않는다. 행동이 일어나는 맥락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 인간의 잣대로 손쉽게 해석하고 결론을 내리는 도구로 의인화가 사용된 경우다.

제인 구달 박사에게 의인화는 선입견을 내려놓고 동물에 다가가려는 노력이었지만, 많은 경우 의인화는 사람의 잣대로 동물의 행동을 해석하는, 그리하여 오히려 선입견에 갇혀버리는 오류로 이어지기도 한다. 동물에 사람의 언어에서 따온 이름을 붙여 부르는 것에 대해 회의적 견해가 여전히 남아 있는 이유다.

새드는 슬픔의 이름인가

이름에는 힘이 있다. 누군가를 ‘새드’라고 부르는 순간, 우리는 슬픔이라는 색안경을 쓴다. 낳는 새끼마다 죽는 이 암컷 개코원숭이에게 어미로서의 삶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엄마’라는 이름은 직접 낳은 새끼를 기르는 경우에만 해당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어느 오후 나는 볕 좋은 곳에 어린 개코원숭이와 앉아 있는 새드를 보았다. 세 살쯤 된, 개코원숭이 나이로는 청소년쯤에 해당하는 어린 암컷이었다. 한쪽 손으로 새드의 털을 젖히고 다른 손으로는 이물질을 골라내는 어린 개코의 손놀림은 바쁘지만 꼼꼼했다. 이내 차례를 바꾸어 새드는 이 어린 개코원숭이의 털을 오랫동안 골라주는 것이다.

서로의 털을 고르는 행동은 꿀벌, 박쥐, 고양이 같은 여러 동물에서 나타나는데, 영장류에서는 특히 자주 일어나고 그 양상이 복잡하다. 털 고르기는 무작위로 일어나지 않는다. 친한 사이일수록 더 많이 하고, 또 위계 서열에서 상위인 개체에 집중되기 때문에, 털 고르기를 주고받는 패턴을 분석해 사회관계망을 유추할 수도 있다. 그중에서도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는 털 고르기가 가장 자주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새드와 털 고르기를 하는 이 개코원숭이는 누구인가? 새드에게는 자식이 없지 않은가? 나중에 조교에게 물으니, 어린 개코는 태어난 뒤 몇 달이 안 돼 어미가 죽었는데, 이후 새드와 각별하게 지내게 되었다고 했다.

분유도 이유식도, 게다가 젖동냥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개코원숭이 사회에서, 어미의 죽음은 새끼가 곧 굶어 죽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젖에만 의존하는 생애 첫 몇 개월이 지나 열매나 풀 등을 찾아 먹을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어미가 없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다. 물론 어미가 이루고 있는 관계망 안에서 서로를 지지하며 살아가는 원숭이들에게 어미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처럼 삶은 어린 개코에게 가까스로 남겨진 듯했지만, 뿌리를 뻗어 자라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새드와의 만남은 거름이 되어 주지 않았을까, 둘을 볼 때마다 생각하곤 했다. 무리가 먹이를 찾아다닐 때도, 나무 위에서 쉴 때도, 둘은 함께였다. 어린 개코가 다른 개코원숭이와 싸우면 어디선가 새드가 달려와 함께 소리를 지르며 편들어 주고, 이내 털을 골라주곤 했다. 많은 영장류 종의 어미와 자식 관계에서 전형적으로 관찰되는 모습이었다.

직접 낳은 새끼를 기를 때만 ‘엄마’인 것일까? ‘새드’는 정말 슬픔의 이름인가? ©백승임<br>
직접 낳은 새끼를 기를 때만 ‘엄마’인 것일까? ‘새드’는 정말 슬픔의 이름인가? ©백승임

엄마는 누구인가

새드는 정말 슬픈가? 새드는 엄마라고 할 수 없는가? 여러 각도에 서 또 시간을 두고 들여다본 새드의 삶은 슬픔이라는 키워드로만 규정되지 않았다. 게다가 새드에게는 어미와 자식 관계와 다를 바 없이 지내는 어린 개코원숭이가 있었다.

출산이 선택사항이 되고 많은 사회에서 점점 더 아이를 낳지 않는 지금, 위 질문은 더욱더 첨예해진다.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은 정말 기쁜 일인가? 새드가 엄마이지 않을 이유는 무엇인가?

직접 낳지 않은 새끼를 데려다 키운 영장류의 여러 사례에 따르면, 새드는 어린 개코원숭이의 이모이거나 큰 언니일 가능성이 없지 않다.(고모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개코원숭이 사회에서는 성체가 된 수컷이 무리를 떠나기 때문에 새끼들은 부계 가족과 만나는 일이 드물다) 하지만 친족이 아예 아니라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혈연관계가 없는 ‘자식’을 키우는 경우는 150종이 넘는 조류, 120종이 넘는 포유류에서 관찰되어 왔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도 예외는 아니다.

아니, 예외라고 해야 할까? 사람은 어떤 종보다 폭넓게 양육의 범위를 적용한다. 반려동물을 자식처럼 때로는 친자식보다 더 아껴가며 키우고, 정작 자기는 아이를 낳지 않았어도 누구보다 큰 사랑을 아이들에게 베풀며 살아갈 수 있다. 사람은 혈연관계가 없다는 사실 을 ‘알고도’ 아이를 키운다. 국경을 넘어, 언어도 생김새도 다른 아이를 자발적으로 입양해 키운다.

심지어 입양된 아이는, 즉 양쪽 부모와 아무 혈연관계가 없는 아이는, 친부모와 사는 아이보다 학대당할 확률이 훨씬 낮다. 그렇다, 높은 게 아니라 낮다. 요즘은 입양을 하려면 까다로운 심사와 적합성 검사를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친부모가 되고자 할 경우 아무도 부모의 ‘자격’을 묻지 않는다. 아이가 한쪽 부모와만 혈연관계가 있는 경우, 즉 아이의 계부나 계모가 될 때도 그렇다. 이 경우 학대율은 가장 높은데도 말이다.

혈연관계에 바탕을 둔 부모 개념에 집착하는 사이, 정작 아이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는 뒷전이 된다. 가족관계증명서가 없는 원숭이 사회에서는 누구도 새드와 어린 개코원숭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데 관심이 없는 듯했다.(우리는 개코원숭이의 언어를 모르므로 확신하지 않겠다!) 다만 한 가지, 새드가 이 어린 개코원숭이에게 양육자의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확실했다. 어린 개코의 삶에서 더 중요한 것은 이 점이 아니었을까?

아이를 낳지 않은 이들의 육아

누군가를 돌보고 키우는 행동은 오랜 진화의 산물이다. 양육행동이 발현되는 데 관여하는 신경내분비 체계는 여러 종에 걸쳐 공통된 양상을 보인다. 예컨대 임신과 출산, 수유 과정에서 일어나는 호르 몬 수치의 급격한 변화는 포유류에서 어미와 새끼가 유대관계를 맺는 데 주요 기전이라는 게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영장류처럼 크고 복잡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종의 경우 양육행동이 호르몬의 영향으로만 지배받지 않는 기전적 ‘해방’이 이루어졌다는 것이 최근 신경내분비 연구의 견해다.3) 대신 양육에 관여 하는 뇌기전이 출산이라는 맥락에서만 국지적으로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 맥락에도 중복적으로 적용됨으로써 초사회성의 기반이 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낳지 않은 새끼를 향해서도 돌봐주고픈 동기가 생길 수 있다면 어떨까? 그래서 죽음의 기로에 섰던 어린 개코원숭이가 누군가의 양딸이 되어 살아갈 수 있다면?

이처럼 양육이라는 ‘행동’이 출산이라는 생리적 맥락에 더는 구애받지 않게 된 것은 사람의 진화에서 중요한 터닝포인트였다. 아이를 낳지 않은 이들도 육아를 하는, 협동육아의 기반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협동육아의 주인공들

임신, 출산, 수유는 포유류 암컷의 생애사에서 가장 큰 에너지가 소모되는 시기다. 신체 자원이 고갈되고, 출산과정에서는 죽음까지 감수해야 한다. 그래서 주어진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할 뿐만 아니 라, 절대적인 자원의 양 또한 평소보다 많이 공급받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 어려운 시기를 극복하는 방식은 종마다 다르다. 사람은 협동육아가 진화한 드문 경우에 속한다.

예컨대 새드가 속한 개코원숭이나 대형 유인원-침팬지, 고릴라, 우랑우탄-에서는 출산한 암컷에게 먹이를 갖다주거나 새끼를 대신 돌봐주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갓 태어난 아기가 궁금해 찾아온 친구들이 산모에게 털 고르기를 유난히 많이 해 주기는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사람에서는 퍽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남편을 비롯해 다양한 친족과 친구가 산모에게 필요한 자원을 대주고 양육을 나 누어 한다. 문화권마다 그 양상은 무척 다양하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아이를 배고 낳느라 고갈된 산모의 에너지를 산모 혼자 충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덕분에 계통적으로 우리와 가장 가까운 대형 유인원과 비교했을 때 사람은 평균 출산 터울이 가장 짧다. 오랑우탄 어미는 한 번 출산 후 다음 출산으로 넘어갈 때까지 5년 가까이 걸리는 데 비해, 사람은 (피임을 하지 않은 경우) 최장 2년이 보통이다. 협동육아 덕에 다음 출산에 필요한 에너지를 더 효율적으로 충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협동육아는 같은 시간 동안 더 많은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기반으로서 사람의 종 번식도를 높인,4) 인간 진화의 추동력이었다.

한 가지 분명히 하자. 협동육아는 엄마를 도와주는 육아가 아니다. 말 그대로 협동해서 아이를 키우는 육아다. 엄마나 아빠가 없더라도 -더 정확히는, 엄마 아빠가 양육자로서 기능하지 못하더라도- 삶의 가능성이 닫히지 않도록 말이다. 따라서 누가 엄마인지, 친모인지 아닌지, 이름 붙이기에 연연하는 육아가 아니다. 양육자의 범위를 유연하게 정의함으로써 양육의 혜택을 최대화한 인간의 협동육아는, 지난 30만 년에 걸쳐 이루어진 인간 진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면이다. 그리고 이 장면의 클라이맥스는 ‘내 아이’가 아닌 아이들에게 손 내밀어 모두어 키운, 아이를 낳지 않은 이들의 육아다.

 

1)  Elisa Fern ndez-Fueyo et al., “Why Do Some Primate Mothers Carry Their Infant’s Corpse? A Cross-Species Comparative Study”, Proceedings of the Royal Society B: Biological Sciences, Volume 288 Issue 1959(2021).
2) 프란스 드 발의 "동물의 감정에 관한 생각"("Mama’s Last Hug") 제2장에 더 자세한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3)  Numan, Michael, The Parental Brain: Mechanisms, Development, and Evolution(Oxford University Press, 2020).
4)  Kramer, Karen, “Cooperative Breeding and its Significance to the Demographic Success of Humans”, Annual Review of Anthropology, 39-1(2010), pp.417-436.

 

이수지

인간을 생명 진화사의 여정 위에서 이해하기 위해 진화인류학과 동물행동학을 공부하며, 지금은 독일 막스플랑크 인구학 연구소에서 현대 인류의 출산과 사망 패턴을 연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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